동화

돌연변이 아빠

방글이 봉선 2006. 7. 14. 10:19

 

날마다 웃음꽃이 피어나던 우리 집.

울적한 마음 달랠 길 없는 친척들마저 웃음보 터뜨려 돌아가게 하던 곳.

그런 우리 집이 어느 날부터 차츰차츰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친척들의 발걸음이 뜸해지면서 할머니의 한숨이 깊어만 가더니 산 너머 산이라고 가족과의 대화도 뚝 끊어져 버렸습니다.

‘누구 탓일까?’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한이가 무릎을 ‘탁’치며 말합니다.

“그래, 고모를 찾아가 물어보는 거야.”

진즉 생각 못한 게 아쉬운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휴대폰을 연결합니다.

발랄한 경음악에 이어 고모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네~~~에~~~~~~~.”

“고모! 저~~ 한이예요. 잘 지내시죠?”

“어라! 한이가 고모 안부를 묻다니……?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속사정도 모르고 까르르 웃는 고모의 목소리가 청량제 한 모금 마신 것처럼 한이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었습니다.

멋쩍은 한이는 조그만 목소리로 말합니다.

“고모 댁에 놀러가고 싶은데……. 언제 집에 계세요?”.

고모는 한이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보고 싶다며 당장 놀러오라 하십니다.

‘어쩌다 이리 되었을까?’

밑바닥 깊숙하게 깔려 있는 보이지 않은 아픔을 털어내려고 고모를 찾아가는 한이의 발걸음이 무겁습니다.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 걷다보니 금세 고모 댁에 닿았습니다.

한이가 벨을 누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문을 연 고모가 활짝 웃으며 반갑게 맞이합니다.

“어서 오게나. 귀염둥이 조카야!”

“어! 추운데 밖에 계셨어요?”

놀란 한이가 큰소리로 말합니다.

“암. 갑자기 한이가 놀러온다기에 잘 보이려고 마당 청소를 하고 있었지.”

“고모도 참! 제가 뭐 손님인가요?”

너스레를 떠는 한이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방에서 기다리라더니 미리 준비해 둔 사과와 아이스크림을 내 놓으십니다.

아이스크림을 보자마자 볼이 미어질 정도로 가득 넣고 오물거리는 표정이 꼭 어렸을 때 보아온 개구쟁이였던 한이 아빠의 모습입니다.

고모는 한이의 이마를 ‘콩’치며 또박또박 묻습니다.

“한아! 요즘 어떻게 지냈니? 할머니는 안녕하시고…….”

묻는 얼굴은 환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걱정이 섞인 모습입니다.

한이는 대답할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고모의 물음이 안개처럼 가슴에 스며들자 더 할말을 잃은 한이거든요.

한동안 아이스크림만 삼키던 한이가 먼산바라기를 하며 말을 이었습니다.

“실은, 요즘 할머니가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셔요. 웃지도 않으시고…….”

한의 말이 너무 뜻밖이라 몹시도 당황스런 고모입니다.

고모는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생각에 잠깁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했던가?’

바쁘다는 핑계로 소홀했던 고모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엽니다.

“한아! 마음속에 품어왔던 생각을 고모한테 찾아와 이야기 해준 네가 대견스러워 고모가 느낀 생각을 말해 볼 게.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질문하렴. 누가 옳고 그른지 판단하라는 거야. 알았지?”

“네, 고모.”

평소 느끼지 못했던 새초롬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한이입니다.

고모는 한이의 손을 맞잡으며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지난 세월이 주마등같더니 TV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야. 한아! 할머니는 고모와 네 아빠가 어렸을 적부터 눈앞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아주 멀리 바라보고 평생을 즐겁게 살아 갈 수 있는 산 같은 든든한 힘을 쌓으며 살아오신 분이란다. 예를 들면, 오래 전부터 할머니는 손수 만든 음식이나 직접 재배한 고추 같은 것을 이웃에게 나눠주셨지. 그렇게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친분이 두터워지게 되었고. 고모가 할머니와 동네 나들이를 가다보면 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니 언제나 하하 호호 웃음꽃이 필 수 밖에……. 철없던 고모가 자랑스런 할머니 곁에 있을 때마다 꽤나 우쭐해 했던 기억이 나는구나. 이웃들의 따뜻한 시선을 받은 뒤통수는 언제나 훈훈했거든. 그런데, 한이 엄마가 회사를 다니고 나서부터 할머니는 소일거리를 못하게 되었지.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돌아오는 네 엄마의 일을 도맡아 하다보니 자꾸 아픈 데가 생기면서 사는 재미를 잃으신 게야. 일하다 힘이 부치면 막내할머니를 불러 도와 달라는 일이 점점 잦아졌지. 그러던 어느 날, 평소 지켜 본 친척들이 아빠를 찾아와 할머니만 부려먹는다고 얄미운 소리를 하셨단다. 화가 난 아빠는 그 소리가 듣기 거북했는지 친척들이 오가는 것도 보기 싫다며 아무도 오지마라고 왕 짜증을 냈어. 고모의 생각으론 친척들 앞에서 아빠가 화를 냈다는 것은 우스꽝스럽고 부질없는 짓이라 여겨졌지. 참새가 기러기의 뜻도 모르고 함부로 짹짹거리지 않았나 싶었어. 그 후,

할아버지 살아 계실 적엔 부모를 기쁘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서슴지 않아 효성이 지극하다고 동네방네 소문난 아빠였는데 어쩌다 그렇게 변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소리가 종종 고모 귀에 들려왔거든. 집안이 화목하려면 엄마라도 화난 아빠를 어떻게든 설득시켜 친척들이 오가며 즐겁게 지낼 수 있도록 할머니 심기를 편하게 해 드리고 먼저 일을 찾아서 하면 될 것을 지금도 변한 게 없으니 어쩌겠니? 오랜만에 고모가 놀러 가면 먹고살기 힘들다는 변명만 늘어놓고, 돈으로 살 수 없는 할머니를 배려하는 마음은 보이지 않으니 저절로 웃음은 사라지고 한숨이 깊어질 수밖에…….”

쉬지 않고 말하자 목이 잠기는지 한의 손을 놓으며 아이스크림을 한 수저 뜨신 고모가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한아! 사람은 누구나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이 있단다. 모든 걸 잘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지. 그러므로 남이 잘하는 것을 칭찬하고 본받으려고 해야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게야. 오직 자기한테 돌아올 몫만 생각하고, 자기를 도와 줄 사람만 찾아다니며 다른 사람의 밑거름이 된 적이 없으면 절대 웃음을 되찾을 수 없어. 할머니처럼 마음에 빗금을 긋지 않고 계산되지 않은 정을 나눠 주다보면 예전의 행복한 웃음이 꽃피게 될 거라 확신하는데 한아, 이해가 되니?”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짓던 한이가 갑자기 입을 삐죽 내밀며 말합니다.

“고모! 고모가 몰라서 그래요. 할머니가 우리를 키워주신 은혜는 하늘만큼 땅만큼 크지만 요즘 들어 점점 잔소리가 많아지셨단 말예요. 이젠 아빠와 엄마도 할머니가 부담스럽고 짜증스러워 진 것 같아 보여요.”

퉁명스럽게 내뱉던 한이가 뒷머리를 긁으며 계면쩍게 웃자 뜻밖의 표정을 짓던 고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야무지게 묻습니다.

“한아! 딱딱하고 꺼칠한 할머니 손을 만져 보았니?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할머니가 얼마나 오래 사실 거라고 생각하니? 돌아가시고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한이가 집에 도착하거든 고모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꼭 전해 주렴. 세대차이 나는 할머니를 모신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마음고생 많다는 걸 고모도 잘 알고 있으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해의 폭을 넓혀 할머니의 뜻에 따라 조금씩 양보하며 즐겁게 지내다 보면 저절로 행복해 질 수 있을 거라고.”

말을 마친 고모가 머리칼이 희끗희끗 센 할머니를 떠올리는지 거실로 나가 소리 없이 눈물만 찍어내기에 한이는 살며시 다가가 고모 품에 안겼습니다.

숨소리도 빨아들일 것 같은 조용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한이는 내시경처럼 할머니의 속마음을 미리 들여다 볼 수 있었더라면 가족의 화목을 위해 중간역할을 잘 했을 거라는 생각이 꼬리를 뭅니다.

고모의 마음이 진정된 듯 보이자 한이가 너스레를 떨며 말합니다.

“고모를 찾아와 할머니의 마음을 알게 되어 매우 기쁘고 흐뭇했고요. 이제까지 뒤죽박죽 엉켜 있던 것들이 제자리로 맞춰지기 시작하는 것 같아 마음도 상쾌해졌어요. 고마워요, 고모. 또 놀러 올게요. 안녕히 계세요”

인사를 하고 총총걸음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향하는 한이의 가슴 밑바닥부터 왠지 모를 뿌듯한 행복이 퐁퐁 샘솟고 있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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